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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창고

삼일절, 삼일운동(3.1운동)의 배경과 의의. 대한 독립 만세!

by 휘벋 2024. 2. 28.

5대 국경일 중 2024년 들어 처음 맞는 국경일, 삼일절이다.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한 날로 관공서 뿐 아니라 가정집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한다. 일제시대를 겪은 우리 선조들을 위로하고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애국선열에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축하 행사는 제한적으로 진행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중요한 발판이 된 의미있고 기쁜 날임은 분명하다. 그럼, 삼일절과 삼일운동(3.1운동)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삼일절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 (사진출처 : 나무위키)

삼일절의 국경일 지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 '독립선언일'이라는 명칭으로 국경일로 지정하였고,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며 계승되었다.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하였다고 명시했다. 3.1운동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으며 건국 정신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이 시기에 헌법재판소에서는 친일재산귀속법에 대해 합헌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삼일절과 삼일운동(3.1운동)의 배경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 당한 후 일본의 만행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는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독립의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던 차에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뇌일혈에 의한 사망으로 발표되긴 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일감정은 극에 치닫게 된다.

민족자결주의 :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


1919년 3월1일. 우리나라 민족대표 33인은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천명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초안은 최남선이,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 33인은 애초 선언서 발표 후, 스스로 자수하고 옥고를 치를 각오를 하였기에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민족대표 48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 대다수는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나 그 중 박희도, 청춘수, 최린과 최남선은 변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일절-조선의-독립운동가
일제시대 조선의 독립운동가 (사진출처 : 경기도뉴스)

독립선언서는 이 외에도 여럿 존재하였으며, 그 중  '충무독립선언서' 는 기미독립선언서의 난해한 문체보다 민중들의 호응을 얻기에 더 적합했다고 한다. 기미독립선언서 발표로 우리가 바라던 실질적 독립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에 독립운동가 김산은 "조선은 어리석게 평화와 자유를 구걸했으나, 세계 열강들로부터 배신당했다. 3.1운동으로 많은 피를 흘리고 희생을 한 이후에야 우리가 바라던 평화가 왔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모두가 싸우는 러시아가 조선보더 더 낫다!"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비판하였다. 


독립선언서 발표 후 학생그룹을 선두로 보신각, 숭례문,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만세운동은 시작되었고 거의 같은 시각에 지방에서도 만세운동은 일어났다. 3월 2일에는 이북 전역으로, 3월부터 4월에는 전국적으로 수 많은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일본은 강압적 진압에 이어 학살까지 자행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도 만세운동은 이미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만행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고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고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던 터라, 폭력시위 양상은 처음부터 안고 있었고, 그 양상은 점점 심해졌다. 그러자 박중양, 식석린, 정석용 등에 의해 만세운동 자제단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약 2개월동안 벌어진 3.1운동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세계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에게 압력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조선의 독립을 외면했다. 결국,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어서야 1945년 8월15일 우리는 나라를 되찾고 대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삼일절과 삼일운동(3.1운동)의 의의

기미독립선언서 발표와 3.1운동은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많은 피를 흘렸지만, 우리에게 즉각적인 독립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일각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부추김으로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죄 없는 학생과 민간인의 피해가 컸음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애국적인 3.1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하기도 하여 모든 지식인과 종교인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시대의 혼란했던 상황과, 사상 이념이 다른 각 단체간의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서울 성밖에서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사진출처:위키백과)

그럼에도, 기미독립선언서 발표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굳은 독립의지를 알리게 되었고, 3.1운동은 국내외에서 따로 움직였던 독립운동 세력의 개혁을 불러왔다. 우리 모두가 독립을 열망하며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단결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하였다

 

 

삼일절과 삼일운동(3.1운동)에 대한 나의 생각과 느낌

어느 시대건 생각이 다른 사람과 내 밥 그릇만이 중요한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 같다. 그로인한 충돌과 갈등 또한 자연스럽게 역사와 함께 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해방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격변기를 살아오신 어르신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에 확 와닿으며 미세한 전율까지 느껴진다. 오늘 하루! '조선 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를 마음속으로나마 힘차게 외쳐봐야겠다.

영화 항거 : 유관순 이야기. 감옥 속 고통과 한이 흑백 영상으로.

 

영화 항거 : 유관순 이야기. 감옥 속 고통과 한이 흑백 영상으로.

독립영화 하면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나 활약상을 그려내지만, 영화 항거는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 8호실에 수감된 이후 1년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투박한 죄수복, 어둡고 습함이 훅 밀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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