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으로 마천루 서울이 온통 폐허가 되었는데 재난 대응 안내방송도 없고 구조도 없는 상황. 우리 아파트만 막막히 홀로 멀쩡한데 외부 생존자들은 살기 위해 몰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정답 없는 시험지에 답을 여러 번 수정하다 결국은 그마저도 지워 버렸다. 당신이라면 등장인물 중 누구의 시점으로 이 영화를 감상할까...
장르 : 재난, 드라마, 액션, 스릴러, 누아르, 블랙 코미디,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등급 : 15세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2시간 10분
국가 : 대한민국
감독 : 엄태화
출연 : 이병헌(영탁 역), 박서준(민성 역), 박보영(명화 역), 김선영(부녀회장 금애 역)
감독과 출연배우
엄태화 감독은 작품 수가 많은 감독은 아니나 단편부터 장편까지, 기본기가 다져진 감독으로 섬세한 연출력과 뛰어난 영상미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영화에는 과거, 다수 작품에 연출부로 참여했던 박찬욱 감독의 색도 짙게 묻어 있다. 하지만 그의 편집은 자연스럽고 대중성이 짙은 편으로 박찬욱 감독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영화 후반, 개성파 배우 엄태구를 노숙자로 잠깐 볼 수 있다. 엄태화 감독이 바로 배우 엄태구의 형이라고 한다. 형의 영화에 우정 출연이라고 하니, 영화계에서 형제들의 활약이 대단한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과 이미 검증된, 믿고 보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로 2023년 여러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다. 2023년 청룡영화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 59회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 조연상, 시각효과상, 음향효과상, 미술상 / 43회 황금촬영상 시상식에 시각효과상 / 32회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여자 올해의 스타상까지 다방면으로 상을 휩쓸었다.
지옥 속 인간의 민낯
이미 모든 것이 초기화된 세상에서는 돈도 명예도 값비싼 명품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오로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이 최선이고, 그 생명줄을 움켜쥔 자가 권력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온 세상은 바뀌었고, 전 세계가 멸망이라도 한 듯 황궁 아파트 103동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저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싫든 좋든 어려운 상황에 외부 생존자들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외부인의 적반하장으로 입주민이 칼에 찔리고 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궁 아파트 103동 입주민'이라는 그들만의 집단이 형성되고, 외부인들은 폐허가 된 사지로 내몰리게 된다.
우연히 권력자가 된 영탁. 영탁 체제의 방향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었다.
- 이 지옥 속에서 탈 없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오로지 충성하는 자 (민성과 방범대원들 외).
- 영탁 체제에서 그냥 안주하며 순응하는 자 또는 순응하는 척하는 자 (대다수의 103동 입주민들).
- 그리고 체제를 거부하거나 불만을 품고 배신하는 자 (도균과 전 관리소장).
세상엔 오로지 103동뿐이어야만 하는 양, 남몰래 외부인을 도와주던 입주민들을 모두 찾아내, 주민들을 소집하고 공개적 형벌을 준다. 6.25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변해가는 군중심리가 무서웠다.
식량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방범대의 행동은 갈수록 과감해져 외부 생존자를 해하고 약탈까지 하게 된다. 그런 행동들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오히려 나라라도 구한 듯 착각에 빠지고 사명감마저 불타오른다. 집단 최면이고 자기 최면이다. 그렇게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끼리 네 편, 내 편을 철저히 갈랐다.
영화 황야.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는 세계관도 스토리도 다르다?'
이들의 비정상적인 행동 앞에서 나는 아직은, 외부인을 남몰래 숨겨주고 도움을 준 도균과, 사실을 알았을 때 도움을 준 명화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만의 신념에 도취된 집단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은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균은 자신을 스스로 포기했다. 명화는...
명화의 행동은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영탁이 만든 황궁 아파트 103동의 집단체제는 이미 내부 갈등이 시작되고, 상처는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을지언정, 그럭저럭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탁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은 무슨 의미였을까.
여기서부터 나의 판단은 흐려져 갔다. '이미 윤리는 없어지고 생존만을 위한 세상이 되어 버린 이 마당에, 영탁의 정체 따위는 묻고 가는 게 맞다'와, '입주민을 살해하고 그 사람 행세를 하는 살인자 대표는 마땅히 법의 심판대에 올려 자격을 박탈하고 내쫓아야 한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한동안은 그 체제가 유지될 것이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황궁 아파트 103동 순수 혈통 사회 유지?' 아니면 '더불어 잘 사는 이상적인 세상의 탄생? ' 명화의 속 시원한 답을 듣지 않는 한, 내 머릿속은 계속 뒤죽박죽이 될 것 같다.
그런 난리통에 외부의 집단과 황궁 아파트 103동 집단은 서로가 적이 되어 삶을 위한 터전을 놓고 전쟁을 벌인다. 결국, 황궁 아파트 입주민들은 터전을 내주고 쫓겨나지만, 누가 승자이고 패자라 할 수 있을까. 모두가 자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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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유토피아가 있을까?
명화는 폐허 속, 무너진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서 따뜻한 주먹밥을 받고 많은 생각에 잠긴다. 그들에겐 외부인이었을 명화를 당연한 듯 받아 준 사람들. 그들은 외부인을 배척하지도 않으면서 너무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저 여기서 그냥 살아도 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살아 있으면 사는 거지.
영화의 마지막은 황궁 아파트 103동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보여주며, 무엇이 옳았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엄태화 감독은 이런 대비적인 화면을 보여주며 명화의 생각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안에서 새로운 문명이 시작됨을 예고하며, 한 가닥 희망을 남기고자 했던 것일까?
- 사람이 누워 쉴 공간은 어디까지 허용될 것이며 얼마나 충분한가?
- 이 지옥에서 물과 양식은 어디에서, 언제까지 구할 수 있을까?
- 주먹밥을 만드는 노동은 누가 하는 것인가?
- 줄 서서 주먹밥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나는 이 공간이 참으로 이상적이긴 하지만, 그냥 억지스럽게 그려진 장면으로 생각되어졌다. 노숙자는 식육을 뜯어먹으며 살아가고, 거리에는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시체가 쌓여가는 현실에서 저들만이 어떻게 저리도 평화로울 수 있단 말인가! 저 폐허 아파트 속으로 들어가려면 '제가 여기서 살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라고 물어봐야 하고 '살아 있으면 살아야지'는 노숙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그럼, 내가 황궁 아파트 103동 입주민이었다면 어땠을까? 외부인을 내 집에 받아들이고, 함께 이 상황을 버텨갈 수 있었을까? 아니, 자신이 없다. 일시적인 재해 상황이라면 충분히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선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박살 난 끝이 없는 상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인간들을 마냥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솔직히 무섭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되어 가는 영탁의 체제도 지지하지는 못하겠다.
그냥 내 집에서 가족과 틀어박혀 살다가 조용히 굶어 죽었을까?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그 안에서 순응하는 103동 주민의 한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면, 도균처럼 그 지옥에서 스스로를 포기해 버렸을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극한 상황을 상상하며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난... 비겁하더라도 끝까지 그 답을 빈칸으로 남겨두려 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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